를 보면 날짜와 일력은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모두 작성해놓았다. 김종옥은 이 당시 교직생활을 시작한 이후 퇴직 때 받은 훈포장 관련 서류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어서, 교직자의 생애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 선생은 새마을운동으로 대통령표창까지 받을 정도로 열심히 한 인물로 당시 자료 사진을 소장하고 있어 수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주목할 만한 근현대사 자료를 소장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료소장처(자)를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본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자료는 총 251점이다. 조사자료 가운데에는 교육교재가 총 91점으로 가장 많다. 이 자료는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부황리 坡平尹氏 충헌공파 관련 고문서이다. 윤시영은 석왕사를 떠나 安邊-元山-高原-永興-定平을 거쳐 함흥으로 간다. 윤시영이 안핵하여야할 대상 지역은 安邊, 德源, 文川, 高原, 永興, 定平, 咸興, 洪原, 北靑, 端川, 三水, 甲山, 長津, 利原 등 함경남도 14개 군이었다.
윤시영은 파평윤씨 貞靖公派 중 襄平公派 34世로 자는 子三, 호는 芸亭이며, 1855년 12월 3일(음력) 忠南 德山郡 古德內面 城洞(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잿골)에서 출생하였다. 맨위에는 절기 및 요일 중 일요일을 표시해 두었다. 대구오피 중 하나가 사초이다. 윤시영은 예산군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랐다. 예산군에서 멀지는 않지만 지금 이 자료가 서산시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윤시영의 아들 尹玟用이 서산군청에 근무를 하게 되자 거주지를 서산으로 옮기면서 이 자료도 함께 서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합격도 저조하여 尹一敎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尹恕敎가 문과에 급제한 이후 과거 합격자가 없다가 윤동술의 아들 윤광섬과 윤광승이 문과에 합격하면서부터 집안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尹暾의 아들 尹昌世(1543∼1593)는 효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임진왜란 때에 의병활동을 하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이중의 대부분은 私文書로 간찰과 시문, 제문 등이 압도적으로 많고 公文書는 거의 없다.龍山書院院生案은 기존의 유생들과는 달리 일정한 자금을 납부하고 서원에 들어온 원생들의 명부이다. 이조리에는 현재까지 종가와 종파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종가 바로 옆에는 최진립을 모시는 龍山書院이 자리 잡고 있다.
1923~1924년 동경 長隆舍書店과 克誠堂에서 발간한 수의학 관련 교재는 당시 수의학의 발전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1908년의 『中等 修身敎科書』는 徽文義塾 교과서 시리즈로, 尹用求의 題籤이 있으며, 내용은 자기에 대한 道, 신체에 대한 本務, 타인에 대한 道로 구성되어 있다. 1941년의 『實習日誌』에는 농업학교의 실습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며, 1947년의 『金錢出納簿』는 중학교 학생이 3년간 쓴 돈의 내역을 일일이 기록한 자료로서 일기류에 속한 자료로 분류할 수 있다. 시권은 모두 4점인데, 누구의 시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입학 관련 서류는 모두 일제강점기의 것이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의 상장과 졸업장은 각각 9점과 5점인데, 1927년부터 1932년까지 木川公立普通學校 이기형에게 수여된 상장, 수료증서와 졸업장 9점이 포함되어 있다. 한말 이후 일제강점기의 교육교재는 모두 79종이다. 그 가운데, 『大韓地誌』 2종은 1899년 학부편집 국장 이규환의 서문이 있는 우리나라 지리교과서로서, 총론,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남도로 나뉘어 서술되어 있다. 광무개혁 이전의 교재는 모두 4종이다. 『朝鮮史』는 1892년 東京 吉川半七藏版에서 발간한 조선사 제1권이다.
연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일제강점기 京城師範學校 附屬 普通學校에서 간행한 『兒童心得』에는 교훈과 실천 12조, 조회․ 1943년 경성제국대학의 『學生便覽』은 법문학부에서 발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大學令(抄), 京城帝國大學通則, 법문학부 규정, 고등시험령(초), 법문학부동창회회칙, 법학회회칙, 문학회회칙 등을 담고 있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서구의 사상이 밀려오는 시기의 유학사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윤시영의 마지막 일기는 1913년 6월 28일자이다. 이렇게 볼 때 1911년부터는 시헌력을 사용하지 않고 백지를 사용하여 시헌력과 같이 먼저 1년치 날짜를 써서 시헌력과 같이 만들어 놓고 일기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910년 시헌력이 음력으로는 11월 30일에 끝나므로 음력 12월 한달의 일기를 이어서 그 뒤에다 써서 붙여놓은 것이다. 644)을 보면 맨 뒤에 12월 한 달의 일기를 백지에 써서 붙여 놓았다. 상전의 정자를 지키는 수직의 잡역을 면제해달라는 내용, 문경에 거주하는 사인 신명환이 음성 탑정리에 있는 자기의 선산에 투장을 한 송수억을 처벌하고 묘지를 옮기도록 조처해달라는 내용, 김사목·